‘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오랜 침묵 끝에 세상에 내놓은 작품으로, 애니메이션의 외형을 입고 있으나 그 내면은 철학, 인생, 인간 존재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로 가득하다.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몽환적인 연출과 섬세한 심리 묘사, 그리고 한마디 말속에 담긴 깊은 상징은 이 영화를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의 핵심 대사 세 가지를 바탕으로,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지 자아를 묻는 대사', '타인과 함께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세 가지 철학적 질문을 풀어보려 한다. 그 대사들은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삶의 본질적 고민을 날카롭고도 부드럽게 건드린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서 한 권을 읽은 듯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하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삶을 돌아보게 하는 대사 (인생)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고통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 문장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메시지 중 하나이자, 마히토가 겪는 인생의 굴곡을 가장 정직하게 요약하는 표현이다. 주인공 마히토는 어머니를 화재로 잃은 후, 새로운 의붓어머니와 낯선 시골 생활, 이질적인 학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중삼중의 시련을 겪는다. 그런 그에게 이 대사는 일종의 '삶의 정면승부'를 하라는 선언처럼 다가온다. 이 대사에 담긴 함의는 단순한 감정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실존적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고통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깊고 넓게 만들어주는 촉매임을 말한다. 여기에는 불교적 무상(無常)의 관점과, 서양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그 극복 의지가 녹아 있다. 미야자키는 영화 속 판타지 세계와 상징적 캐릭터들을 통해, 고통이 피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삶을 진짜로 만드는 요소임을 은근하게 강조한다. 또한 이 대사는 관객의 자전적 기억과도 맞물린다. 누구나 인생에서 마히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며, 예상치 못한 상실을 겪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이 문장은 어쩌면 위로보다 더 강력한 공감과 각성을 안겨준다. '고통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은, 우리 삶이 단지 기쁨과 성공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이 한 줄의 대사를 통해 관객 모두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이 대사는 영화 속 마히토의 성장이기도 하지만, 스크린 너머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아를 묻는 대사 (성찰)
“나는 나를 믿지 못해. 그래서 매일 나를 다시 만들고 있어.” 이 대사는 단순한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아의 형성과 해체, 그리고 재창조를 반복하는 인간의 본질을 건드리는 문장이다. 마히토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혼란스럽게 탐색한다. 그는 어떤 이상적인 인물도 아니고, 완성된 주체도 아니다. 오히려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란 본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 대사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다. 마히토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하루하루 재정의하고 새롭게 구성하려 한다. 이는 결국 '나 자신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 대사는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과도 깊이 관련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우리는 고정된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과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설정해야 한다. SNS, 경쟁, 비교, 타인의 기대 속에서 자신을 잃는 일이 빈번한 이 시대에, 이 대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야 함을 강조한다. 마히토가 이 말을 할 때의 표정과 목소리는 단순히 불안에 빠진 소년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지한 어른의 성찰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 있다. 매일 나를 다시 만든다는 말은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변화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뜻한다. 결국 이 대사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나는 나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믿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미야자키는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계속해서 자기를 만들어가는 용기를 말하고 있다.
타인과의 연결을 말하는 대사 (명언)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하지만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해.” 이 대사는 인간 관계의 본질적 균형을 정확히 짚어낸다. 고독과 연대, 독립과 의존, 혼자 있음과 함께함. 이 상반된 개념들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문장이다. 마히토는 작품 속에서 다른 인물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깨지고,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타인에게 기대면서도, 동시에 자기 발로 서야 함을 배운다. 이 대사는 '함께하는 삶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맹목적 의존은 경계한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힘, 즉 정서적 독립성과 정신적 자립성을 확보한 사람만이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자기 완결성(self-containment)'의 철학과 일치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이 대사는 매우 현실적이다.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확산된 '고립'과 '단절'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욱 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동시에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이 대사는 그러한 양면적 현실을 모두 인정하며,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관계에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 말 한 줄에 깊은 인생의 진리를 압축했다. 이 말은 어릴 땐 이해되지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공감되는 말이다.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진짜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고독을 견디는 법을 알아야 진짜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 이 대사는 단순한 명언 그 이상이다. 그것은 성숙에 이르는 가장 조용하고도 묵직한 깨달음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단순히 스토리를 전달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왜 사는가? 너는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우리에게 속삭이듯 전달된다.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 자아란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고민, 그리고 혼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적 통찰까지.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한 편의 인생 철학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한 번쯤 자문해보길 바란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