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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풍경이 감정이 될 때: '일초 앞, 일초 뒤' 로케이션의 힘

by lila-wx0x 202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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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초 앞, 일초 뒤' 공식 포스터

 

2024년 일본 영화계는 다시 한번 감성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중 ‘일초 앞, 일초 뒤’는 하루의 작은 순간들이 인생의 방향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나 드라마가 아니라, 시간과 감정, 그리고 인간관계의 교차점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본 리뷰에서는 등장인물의 관계성, 독특한 시간 연출 방식, 그리고 일본적 미학이 녹아든 로케이션 활용까지 자세히 살펴보며, 이 작품이 왜 2024년 최고의 일본 영화로 추천되는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인물 중심 이야기의 매력

‘일초 앞, 일초 뒤’는 일상의 지극히 평범한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만남의 기회를 정교하게 포착해낸 작품입니다. 주인공 하루카는 프리랜서 작가로,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루틴 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반면 유키는 사진작가로,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스쳐가는 순간을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두 인물은 서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며, 처음에는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존재감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과정이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에 관객은 그들과 함께 감정을 공유하며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인물 간의 직접적인 대화나 교류가 적다는 점입니다.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은 드물고, 오히려 각자의 시점에서 서로를 관찰하거나 지나치는 모습이 주를 이룹니다. 대사보다는 표정, 제스처, 그리고 주위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의 발전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하루카가 유키의 사진 전시회를 우연히 방문했을 때,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진을 발견하는 장면은 대사가 전혀 없이도 강한 감정이 전달됩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운명과 타이밍, 그리고 한순간의 결정이 가진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또한 두 인물의 감정선은 빠르게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현대 영화들처럼 빠르게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극적인 이벤트를 배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과 작은 행동을 통해 감정을 조금씩 쌓아가며, 관객이 그들의 관계를 서서히 이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 느린 전개가 오히려 영화의 진정성과 감정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시간 연출과 영화의 구조

‘일초 앞, 일초 뒤’에서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장치입니다. 영화는 선형적 시간 흐름을 따르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러한 구성은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질 때 강력한 몰입감을 유발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연출 중 하나는 ‘거꾸로 가는 시계’라는 메타포입니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이 시계는 시간의 절대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상징하며, 주인공이 놓친 찰나의 순간과 그로 인해 바뀌는 감정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플래시백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닌, 현실에서의 행동과 감정을 반추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유키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던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겪는 상황이 겹쳐지는 연출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감정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편집 역시 매우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빠른 컷 전환보다는 긴 호흡의 롱테이크를 주로 사용하여, 인물의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도록 돕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합니다. 카메라는 종종 인물의 뒷모습이나 창밖 풍경을 따라가며 관객이 스스로 장면을 해석하도록 유도합니다. 사운드 디자인 또한 시간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계 초침 소리, 기차의 출발음, 거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등이 반복되며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합니다. 음악은 절제되어 사용되며, 대부분의 장면은 배경음 없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는 관객이 영화 속 '현재'에 집중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단순한 연출 기술을 넘어, ‘시간이 만든 관계’라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더욱 깊게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일본적 정서와 로케이션 활용

이 영화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일본 특유의 감성과 미학이 로케이션과 장면 구성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점입니다. '일초 앞, 일초 뒤'는 도쿄 중심지가 아닌, 교외의 한적한 동네와 오래된 역사를 지닌 역 근처를 주 배경으로 삼습니다.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세이타 역’은 실제로도 오래된 목재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적 역이며, 이는 현대적인 소재와 대비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상징하는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이 역에서 하루카와 유키는 반복적으로 마주치며, 장소 자체가 두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처럼 사용됩니다. 또한 골목길, 오래된 찻집, 철길 옆 벤치 등 일상적인 일본의 공간들은 단순한 배경 그 이상입니다. 그곳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들—자판기에서 음료를 고르다 엇갈리는 장면, 책방 앞에서 서로 같은 책을 들여다보는 순간—은 일본적 ‘와비사비’ 감성과 일맥상통합니다. 계절의 변화 역시 정서 전달의 중요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봄의 벚꽃은 시작과 가능성을, 여름의 장마는 갈등과 혼란을, 가을의 낙엽은 변화와 이별을, 겨울의 눈은 정화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합니다. 영화는 계절 변화에 따라 색감과 조명을 조절해 인물의 심리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이로 인해 관객은 장면 하나하나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촬영 방식 또한 일본 전통의 정적인 구도를 따릅니다. 빠른 전환이나 흔들리는 카메라 대신 고정된 앵글과 대칭적인 구성을 통해 차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기보다는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결국, ‘일초 앞, 일초 뒤’는 일본의 장소, 문화, 정서적 배경을 이용하여 전 세계 관객이 보편적인 감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초 앞, 일초 뒤'는 거대한 서사나 강한 갈등 없이도 깊은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 작품입니다. 한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이야기하며, 관객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2024년 현재, 감성적인 영화가 필요한 이들에게 이 작품은 최고의 추천작이 될 것입니다. 시간을 되짚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는 조용한 위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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